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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세계 10위 일본 자동차 브랜드 토요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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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보통. 2020. 6. 25.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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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세계 10위 일본 자동차 브랜드 토요타의 역사

 

 

TOYOTA

ENJOY YOUR STYLE

- TOYOTA

한국 시장용 캐치프레이즈.

START YOUR IMPOSSIBLE - 2017년 11월부터의 일본 캐치프레이즈.


토요타 자동차 주식회사(トヨタ自動車株式会社) 일본의 기업 집단 및 그 산하의 차량 브랜드이다.

일본 아이치현 토요타시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차량 메이커이자 기업인데, 일본 전체 주식시장 1위의 시가총액을 자랑하며 동시에 전세계 자동차 회사들 중에서도 시가총액 1위의 기업이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豊田汽車라고 부른다.

2019년, 포춘 500 기준 2726억 12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이는 세계 10위 규모에 해당한다.

 

역사

토요다 사키치가 창업한 토요다 자동방직기제작소가 모태로, 현재의 자동차생산 사업부는 1933년에 신설되었다. 이후 1937년 별도법인화. 초대 사장은 토요다 리자부로(豊田利三郎). 현 최고경영자는 창업주의 후손인 토요다 아키오(豊田章男).

한편 사명은 설립자의 성씨인 豊田을 딴 회사 이름이기는 한데, 이 사람의 이름은 토요가 아니라 토요이다. 그런데 왜 회사 이름이 '토요타'냐 하면 그쪽이 어감이 더 좋아서라나. 일본에서는 토요다 사키치가 서양인들이 발음하는 걸 보고 서양인들에겐 'TOYODA'보다 'TOYOTA'가 더 발음하기 쉬워서 바꿨다는 게 정설. 1936년부터 상호를 토요타(トヨタ)로 변경하였다. 공식적으로 한자가 아니라 카타카나로 쓰는데 이름 획수가 합쳐서 8획이면 운이 좋아서 이렇게 했단 얘기도 있다. 그걸 증명한 건지 태평양 전쟁 당시 군용트럭을 생산하기도 했지만 단 한번도 폭격을 당해본 적 없었고 정작 토요타 공장을 폭격하려 계획을 세우자 일본이 패망해버렸단 얘기도 있다.

패전 후 1949년 일본 전체가 닷지라인불황에 빠졌을 무렵 토요타자동차는 경영위기를 겪는다. 토요타자동차는 당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은행, 거래업체 등에 채무상환유예, 대금지불유예를 요청했지만 딱 두 회사로부터 거절당한다. 스미토모은행은 토요타의 채무상환유예를 거절하면서 칼같이 채무를 회수해갔고, 카와사키제철은 대금지불유예를 거절한다. 이때의 충격으로 창업자 토요타 키이치로가 급사했고, 정말 말 그대로 토요타는 망할 뻔했다.

이후 토요타는 그때의 원한을 기억하며 모든 거래에서 스미토모은행과 카와사키제철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일단 스미토모은행에는 절대로 대출하거나 예금을 맡기지 않았다. 그리고 스미토모은행이 1965년 자신의 거래업체인 프린스자동차가 경영위기를 겪자 토요타에 도움을 요청하는데, 당시 토요타가 딱 잘라 거절했다.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철강을 살 때도 카와사키제철의 것은 절대로 사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 두 회사와의 거래는 1949년의 경영위기로부터 50년 이상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재개되었는데, 이는 모두 토요타와의 거래관계에 있던 은행, 회사와 경영통합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거래가 재개된 것이다. 스미토모은행과는 미스이 계열의 사쿠라은행과 경영통합되어 미스이스미토모은행으로 재탄생하자 거래가 튼다. 다만, 이때도 거래관계는 구 사쿠라은행 쪽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카와사키제철 역시 일본제관과 합병하여 JFE스틸로 재탄생하면서 거래가 재개되었는데, 역시나 구 일본제관 쪽 인물을 통해서만 거래한다고 한다. 질긴 원한... 참고로 미스이그룹과 일본제관은 토요타가 경영난을 겪었을 때 채무유예, 대금지불유예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한다. 이 사례는 토요타 본사 인근에 있는 나고야 사람들의 특성의 예로 거론되기도 한다.

1970년대 전 세계적인 석유 파동을 겪은 시점부터, 상대적으로 연비가 좋고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이 부각되어 폭발적으로 판매량이 증가, 저렴한 가격에 믿을 만한 내구성의 자동차를 생산한다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미에서는 아직도 중고차 감가상각이 가장 적은 차량들 중 하나가 토요타 물건들이다. 이는 패전 이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에서 배척받았던 에드워즈 데밍의 품질관리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혁신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전기 모터와 내연기관을 상황에 맞게 사용하여 연비를 향상시키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최초로 상용화하는데 성공한 기업이기도 하며, 하드타입 하이브리드 분야에 있어서는 절대적 강자. 유일하게 하이브리드 모델을 100만대 이상 팔아치운 기업으로 모델은 토요타 프리우스.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중소규모 군벌들이나 테러리스트들이 토요타의 픽업트럭에 기관총, 무반동총 등을 단 테크니컬이 있는데, 1987년엔 차드-리비아 분쟁에서 기동성을 살린 테크니컬들이 전차를 위시한 기갑부대(!)를 발라버린 사건도 있었다.(...) 일명 토요타 전쟁.

산하에 별도의 디비전으로 1989년에 런칭한 프리미엄 브랜드인 렉서스(LEXUS)를 두고 있다. 그리고 최초의 렉서스 차량인 LS의 일본 내수 사양인 토요타 셀시오에 최초로 현재 사용되는 로고가 적용되었다. 지분관계를 통한 자회사로 편입된 완성차 업체는 상용/특장차 부분의 히노(HINO)와 경승용차 전문 기업인 다이하츠가 있다. 4WD/수평대향엔진 기반 차량에 특화되어 있는 스바루 역시, 렉서스/다이하츠/히노와는 다른 형태로 토요타와 협력관계에 있다.

허나 잘 나가던 토요타도 2010년 자동차 역사상 최악의 위기인 토요타 리콜 사태를 맞는다. 그러나 2012년 1분기에는 다시 세계 1위를 탈환했다.AutoM 기사 내용 심각한 위기(그것도 안전과 관련됨)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난 것을 보면 토요타의 네임밸류(브랜드가치)가 결코 작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리고 2016년 10월 12일, 스즈키의 스즈키 오사무 회장은 토요타 자동차와 제휴를 검토하기로 했다고 전격발표했다. 이로써 일본의 자동차 3강(토요타, 혼다, 닛산) 구도가 더욱 명확해지게 되었다. 관련기사. 그외 변속기로 유명한 아이신, 자동차 부품업체 덴소, 일본 5대 특수강업체 아이치스틸 등을 거느리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1960년대 중반에 신진자동차와의 기술제휴 형태로 진출했다. 원래 신진자동차는 미쓰비시 자동차와 기술제휴를 하려고 했었는데, 이 과정에서 신진자동차가 미쓰비시 자동차로 부터 콜트 1500을 100대 들여오면서 특혜 논란에다가 폭리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졌고(당시 제2의 새나라자동차 파동이라고 했었을 정도였다), 이 와중에 한국시장 진출에 뜻이 있었던 토요타가 잽싸게 신진자동차를 꼬드겨서 신진자동차가 토요타와 기술제휴를 하게 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토요타의 차종을 넉다운 생산하여 한국 시장에 판매하던 신진자동차는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을 사실상 독과점 하는 지위에 있었지만, 1972년 저우언라이의 일명 저우 4원칙으로 인하여 중국 시장에 진출하려던 토요타는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한국에서 내빼고 말았다.[10] 그 이후 한동안 한국 시장에 재진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국시장에 미련을 못버렸던 것인지 24년후인 1996년에 진세무역과 인치케이프 코리아 라는 자동차 수입업체를 통해서 미국에서 생산된 아발론을 한국시장에 런칭 하였으며[12], 2000년 3월 드디어 28년만에 한국 재진출을 하면서 한국 현지 법인인 한국토요타자동차(주)를 설립하였다. 2009년 정식적으로 토요타 브랜드를 재런칭하기 전까지는 렉서스 브랜드를 판매했으며, 2009년 10월에 정식적으로 토요타 브랜드를 한국에 재런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8년 3월엔 한국토요타자동차가 모범납세 법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주요주주로는 일본트러스티서비스신탁은행주식회사(11%), 주식회사토요타자동직기(6.9%), 일본마스터트러스트신탁은행주식회사(4.7%), 일본생명보험상호회사(3.6%), State Street Bank and Trust Company(3.1%), 덴소(2.6%), JP모건체이스(2.1%), 미쓰이스미토모해상화재보험주식회사(1.8%), 자산관리서비스신탁은행주식회사(1.8%), The bank of new york mellon(1.7%) 등이 있다.

계열사로 토요타 방직, JTEKT, 토요타자동직기, 아이치 제강, 아이신정기, 덴소, 후지중공업 등이 있다. 지분관계상 KDDI의 2대 주주이며 이스즈자동차의 3대 주주이기도 하다. 2017년에는 마쓰다의 실질 최대주주가 되기로 합의.

  • 1대 사장 - 토요다 리사부로(키이치로의 매제)

  • 2대 사장 - 토요다 키이치로

  • 3대 사장 - 이시다 타이조

  • 4대 사장 - 나카가와 후키오

  • 5대 사장 - 토요다 에이지(기이치로의 사촌)

  • 6대 사장 - 토요다 쇼이치로[14](기이치로의 장남)

  • 7대 사장 - 토요다 타츠로(기이치로의 차남)

  • 8대 사장 - 오쿠다 히로시

  • 9대 사장 - 쵸 후지오

  • 10대 사장 - 와타나베 카츠아키

  • 11대 사장 - 토요다 아키오(쇼이치로의 아들)

전범, 혐한 논란

토요타를 전범기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또는 그냥 일본 기업이라고 해서 사지 말자는 사람들이 있다. 일례로 오래전 얘기긴 하지만 렉서스나 토요타 등등 일본차를 타고 다니면 다음날 차에 벽돌이나 오물이 던져지는 등의 테러를 당한다거나, 항일시위단이 시위하는데 일본차를 타고 지나가면 차주는 끌어내려져 다굴당하고 차는 밟혀 부서진다는 블랙 유머나 도시전설도 있었을 정도로 일본차 소유자에 대한 인식은 싸늘했다.

문제는 이런 인식에 반해, 실제로 토요타가 극우기업이거나 전범기업이라는 실질적 근거는 매우 적다. 토요타와 유일하게 전범기업에 관계된 것이 토요타에 철강을 공급하는 회사 중 하나인 '아이치제강'인데 이 회사가 미쓰비시급의 전범기업이라고 하긴 어려운 게 미쓰비시의 징용 작업장은 27개인데 반해 아이치제강의 작업장은 단 1개였다. 1개는 27개든 강제 징용이 있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애초부터 작업장 여부로 강제 징용 여부를 판단한다... 살인을 1번 하든 여러 번 하든 살인죄로 처벌받는 것처럼)

또한 토요타가 혐한들을 지원하거나 그런 행보를 했다는 뜬소문도 있으나, 정작 실제로 그런 적은 없으며 말그대로 카더라에 불과하다. 특히 토요타 재단은 2002~2007년에 '군대와 성폭력' 연구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 연구를 통해 많은 종군위안부 연구자들이 수혜를 입었다. 재일교포 2세로 다년간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온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와 일본의 위안부 사죄 및 개인배상을 요구해오며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출간해온 일본의 전쟁책임자료 센터(日本の戦争責任資料センター)도 지원을 받았다. 18년 넘게 북한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 조사를 진행해온 재일교포 르포 작가 김영 또한 수혜를 입었다. 최근에는 일본의 전반적인 우경화 때문에 이런 사업에 지원을 하고 있지 못하지만, 극우 행보와는 전혀 딴판임을 알 수 있다.

토요타가 극우 지원이라고 오해받는 이유 중 하나는 우익 진영에서 토요타를 많이 사가고 이용해서라고 하는데, 물론 우익 진영들이 토요타를 사가거나 관용차 등으로 쓰는 건 사실이나 이것 하나만으로 회사 자체를 우익 지원이다 이렇게 단정짓긴 힘들다. 그렇게 보자면 르노삼성과도 인연이 깊은 닛산 역시 르노가 인수하기 전에는 우익들이 많이 사가거나 이용한 적이 있기도 하다.

앞서 말한 아이치제강 외의 전범이라는 근거는 전무하며 독도 다케시마 후원 기업(?)이라는 해괴한 목록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근거 없는 선동에 불과하다. 또한 역사왜곡 기관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지원기업이라는 카더라도 있으나, 정작 지원명단에는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새역모] 애초에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멋모르고 지원했다가 나중에 알고 뒤늦게 손씻은 일본 기업들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하지만 1972년에 저우 4원칙 때문에 중국시장 진출에 뜻이 있었던 한국시장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토요타 입장으로서는 현재로서도 씻을 수 없는 크나큰 오점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사건으로 인하여 토요타는 한국에서 평생까임권을 획득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일개 기업이 한 국가를 상대로 단교 선언한 경우는 토요타가 처음이었다고... 그것도 판매가 부진한 시장이 아닌 사실상 시장을 독과점할 정도로 잘 팔리던 시장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하였기에 상당히 충격이 컸다. 덕분에 당시 토요타와 합작을 해서 자동차를 생산하던 신진자동차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고, 그러한 원죄로 인하여 오랫동안 한국에 재진출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2000년대 초반에 28년만에 한국시장에 재진출 했을때도 토요타 브랜드 보다 렉서스 브랜드를 먼저 런칭했고 렉서스가 토요타 계열이라는 것을 철저히 숨기려 했던 것도 이런 이유였고, 2000년대 후반에 토요타 브랜드를 런칭할 때도 이런 이유 때문에 매우 신중했다고...

  • 한국과의 인연

위와 같은 1972년 한국시장에서의 일방적인 철수, 반일감정이나 한일관계 악화 등에도 불구하고 한편 이래저래 한국에 어필하고 구애하는 측면이 있다. 토요타 캠리의 한국 광고모델은 정작 일본 국내에서 반일배우라고 욕먹었던 김태희이다. 덕분에 일본 내 넷우익 사이에선 후지테레비 같은 한류 기업으로 찍혔던 사례가 되었다.



(...) 멘탈갑

2012 런던 올림픽에서 축구 종목 동메달 결정전이 벌어지기 직전엔 이런 현수막도 붙였었는데, 여기까지만 보면 그러려니 할 수 있겠으나 문젠 이 동메달 결정전이 바로 한일전. 흠좀무 이미 4강에서 패배하여 3/4위전에 진출해버린 이상 한국이 메달을 따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일본 국대를 이겨버리는 것인데...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이 일로 인해 한국에선 기사까지 나는 등 꽤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일본에선 당연히 자이니치라며 까였지만. 당시 나카야바시 히사오 한국토요타 사장은 "모기업이 일본 기업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사업을 하기 때문에 한국을 응원한다"고 얘기했다. 뿐만 아니라 2015년엔 해외에서 열리는 K-POP 콘서트인 CJ E&M의 "KCON"에 메인 협찬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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