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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어떤 회사인지 알고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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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보통. 2020. 5. 2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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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어떤 회사인지 알고 타자

 

역사

쌀가게 '경일상회' 주인이던 아산 정주영 일제강점기 1940년 3월에 인수하여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운영했던 아도서비스(Art Service)라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그 근원으로 볼 수 있다

정주영은 빨리, 완벽하게 고치고 수리비는 많이 받는 방침으로 사업 성공의 토대를 닦았다. 1940~1942년 당시 조선에서는 자동차는 극소수의 부유층이나 가지고 탈 수 있는 매우 비싼 사치품이었고 그 때문에 자동차를 빨리 수리해야 고객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른 수리공장에서는 수리비를 더 받으려고 자주 늑장을 부렸다. 그러나, 정주영 사장은 '자동차가 고장나면, 차 주인이 발이 묶여 힘들어 한다. 그러므로, 빨리 차를 고치는 게 고객을 위한 길이다.'라고 생각했다.

밤 12시까지 작업소에 머물면서, 고객들 차를 빨리 빨리 수리했다. 이처럼 "빨리 빨리"와 "빠르고, 정확하고, 납기 준수"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경영은 순조로워 수익을 많이 냈다.그러나 이후 공장이 불타 없어지고 전쟁까지 일어나자, 사업이 어려웠다. 결국 일제는 기업 통제정책인 ‘기업정비령’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 종로 5가에 있는 '일진공작회'로 정주영이 소유하던 아도서비스가 강제 흡수·합병되었다. 정주영은 어쩔 수 없이 자동차 수리업을 그만두었다. 이후 아도서비스를 정리한 자금으로 트럭을 구입하여 석탄운반업을 하였으며, 해방 이후 중구 초동의 적산대지를 불하받아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다. 설립 직후에는 미군 병기창에서 하청을 주로 받았으나 점점 수요가 늘었고, 이 회사를 현대토건사가 흡수해서 현대건설로 변모한다.

 

현대자동차의 공식적인 역사는 1967년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들면서부터 시작한다. 1967년 12월 정주영의 동생 정세영이 정식으로 회사를 설립하여 당시 자동차 최강국인 미국 포드와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1970년대 중후반에는 메르세데스-벤츠와도 기술제휴를 맺었다.

이후 독자적인 모델의 생산을 위하여 자체개발을 시작했으며, 영국 최대 자동차 회사 브리티시 레일랜드 부사장이었던 조지 턴불을 영입하고 1974년 7월부터 1억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연산 5만6000대 규모의 종합 자동차 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1976년 1월 대한민국 자동차공업의 자립화를 선언한 고유 모델인 포니를 시작으로 독자모델 생산을 시작하여[12] 쏘나타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최대 자동차 기업으로 떠올랐고, 아시아에서 2번째로, 독자 자동차 모델 생산국이 되었다.

1977년 당시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 대사는 정주영 회장을 만나 “현대가 자동차 독자 개발을 포기하면 포드 제너럴 모터스든 원하는 조건으로 조립생산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해 현대를 지원하겠다. 중동 건설에서도 현대를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정주영은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나 다름없고, 일생에 번 돈을 다 들여 실패하더라도 후대에 자동차 공업을 성공시킬 디딤돌을 놓는다면 후회는 없다"며 거절했다.관련기사 아무래도 대한민국이 언젠가는 미국 자동차 산업을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결국 모든 압력을 무시하고 독자개발을 밀어붙였다.

1976년 에콰도르 포니 5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국산차를 해외 시장에 내놓았다. 1980년대  엑셀을 북미 지역으로 수출해서 북미 시장에 진출했다. 현재는 전 세계로 자동차를 수출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사실 이 기간 동안은 현대자동차의 사활이 걸린 기간이었다. 정주영은 1960년대에 현대자동차 내부에서 자동차 엔진을 자체 개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엔지니어들의 전문성은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편이었고, 정부에서도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지 압박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정주영은 여기서 중공업은 나중에 투자하여 키워도 된다고 판단했기에 현대자동차를 택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체 엔진 개발에 착수하기 위해 해외에서 GM에 근무중이던 이현순 박사를 불러 엔진 자체 개발 연구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이때 정주영은 이현순 박사에게 자체 엔진을 개발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지원을 하겠다면서 설득했고 결국 이 박사가 이 제안을 수락하자 정회장은 연구소를 건설해주기 시작했는데, 이 연구소가 바로 현대자동차 마북리 연구소이다. 물론 성공확률은 낮았고, 주변에서의 실패할 거라는 무시, 그리고 당시 미쓰비시에서 엔진 설계도를 사와서 제조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미쓰비시에서의 압박도 상당했다.

하지만 이현순 박사의 끈기있는 노력 덕분에 현대자동차는 국내 최초로 자체 엔진을 개발해냈다. 프로젝트 내 이 엔진의 이름은 알파엔진이다. 이후 베타엔진, 감마엔진을 설계, 개발했다. 하지만 감마엔진은 당시 현대자동차의 경영진이 미쓰비시의 시리우스2엔진과 관련하여 계약을 맺는 바람에 설계만 하고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이후 이현순 박사는 감마엔진에서 성능을 더욱 향상시킨 세타엔진을 개발해냈고, 이 세타엔진은 바로 NF소나타에 장착되게 된다. 이후 2008년까지 타우엔진을 개발하게 된다.

 

품질

신차 품질은 그나마 괜찮으나 내구성 품질은 떨어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다만 자동차 품질에서 흔히 인용되는 미국 J.D. Power의 초기품질조사(Initial Quality Study, IQS)에서 현대는 2012년 18위까지 떨어졌다가 2014년 이후 8위 이내 상위권에 들고 있다. 2012년 이전 안정적으로 하위에 들던 기아는 아예 2015년 이후 2-1-1위로 올라섰으며, 2018년에는 아예 현대차 그룹의 3개 브랜드가 1~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같은 J.D. Power에서 출고 3년 후 실시하는 내구품질조사(Vehicle Dependability Study, VDS)에서 현대는 2013~2016년 동안 20위 밑으로 처졌으며, 또한 출고 연도의 IQS 순위에 비해서도 계속 낮은 순위에 놓이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신차에 비해 시간이 지날 수록 불량이 많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기본 설계를 공유하는 기아 또한 비슷한 경향을 갖고 있다. 다만 현대와 기아 공히 2014년 이후 IQS에서 10위권 이내로 초기 품질이 향상되었는데, 이들 신차가 출고 3년 후 VDS에서 비슷한 순위를 기록한다면 이제는 현대 차량의 장기 내구성이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2014-15년 신차가 대상이 되는 2017-18년 VDS는 각각 6, 7위로 상당한 향상을 보였다.

단 고장과 별도로 구매자의 만족도를 조사하는 APEAL(Automotive Performance, Execution and Layout) 조사에서는 매년 부침은 있지만 아직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2018년에는 제네시스가 포르셰와 근소한 차이로 1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반작용으로 현대는 대중차 평균보다 낮은 수치로 26위에 그쳤다. 2015년 대중차 중 2위에 오른 후 제네시스와 에쿠스를 떼낸 것을 고려해도 급하락한 것이다.

현대, 기아의 J.D. Power 품질 조사 실적은 아래와 같다. (순위 다음의 수치는 100대당 품질문제 건수를 가리키는 PP100로, 숫자가 작을 수록 품질이 좋은 것으로 인식된다.)

최근 모델들은 과거에 비해 <올해의 차> 등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편이다. 미국 컨슈머 리포트, JD Power, 영국의 Driver Power, 프랑스 L’Automobile Magazine, 호주, 뉴질랜드 등등 해외 각국의 미디어에서 품질과 소비자 만족도에서 좋은 평가를 얻는 비중이 늘어나는 중이며 영국 BBC 탑기어 역시 상황은 비슷해서 과거에는 자동차 성능 등의 종합적인 면에서 극딜을 많이 맞았지만 탑기어 시즌 23을 기준으로는 현대 i30 N을 소개하면서 칭찬이 나오는 사례도 있다. 다만 후반부에서 가격이나 제원, 창의성 등은 여전히 비판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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