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이다. 현재 케링 그룹 소속의 자회사이다. 패션 하우스로서 구찌는 그랑 쿠튀리에의 자격으로 오트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이며 동시에 레디 투 웨어 제품도 생산하고 있다.
유명한 명품 패션 브랜드 중 하나이며, 프라다나 펜디와 비슷한 급의 브랜드로 평가 받고 있다. 한때는 프라다와 펜디가 꽤나 많은 인기를 받고 있었는데 구찌 혼자 3대 명품 브랜드에 밀린 콩라인 취급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톰포드 시절엔 가장 핫한 남성복라인으로 3대 명품을 압도했고, 2015년 이후 20,30대 밀레니엄 세대에서 가장 핫한 명품으로 재부상했다. 2019년 96억 유로의 매출을 기록, 루이비통에 이어 업계 2위의 매출을 달리는 브랜드이다.
루이비통, 펜디, 고야드 등과 마찬가지로 특유의 반복되는 모노그램이 아시아에서 특히나 인기가 있는 브랜드이다. 한국에는 롯데백화점 본점, 잠실점, 부산본점, 인천터미널점, 광복점, 센텀시티점, 대구점, 광주점 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 명품관, 대전 타임월드, 수원 광교점에 입점해있고 신세계백화점 본점, 강남점, 센텀시티점, 대구점, 광주점, 경기점, 의점부점, 영등포점에 입점되어있다.
구찌는 구찌오 구찌 (Guccio Gucci)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설립하며 시작되었다. 1897년 런던의 최고급 호텔 사보이 호텔에서 일하던 구찌오는 상류층 손님들의 고급 가방에서 영감을 얻고 1902년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 가죽공방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1921년 피렌체에 자신의 이름을 딴 가죽 용품과 작은 가방을 취급하는 첫번째 구찌 매장을 오픈하였다. 1930년대에는 상품라인을 더욱 확장하여 다양화 시켰으며 구찌의 주 고객층인 귀족들의 승마 용품에 대한 수요로 인해 독특한 홀스빗 아이콘을 개발하게 된다. 1938년에는 이탈리아 쇼핑 중심지 로마 콘도티 거리에 매장을 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패전국이던 이탈리아의 자재 공급에 어려움을 겪자 많은 가죽 업체들이 문을 닫았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첫째 아들 알도 구찌는 일본에서 수입 가능하던 대나무로 제품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를 계기로 구찌를 상징하는 여러 제품 중 최초의 제품이 된 "대나무 백"을 만들게 된다. 대나무 백은 당시 귀족과 유명인사의 애장품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오늘날까지도 애장품으로서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가방 외에도 시계, 벨트, 손잡이 등 여러 곳에서 활용되며 많은 관심을 받았다.
1951년에는 말 안장에서 영감을 얻은 그린, 레드, 그린으로 이루어진 삼선 마크 "더 웹"을 개발했다. 오늘날에도 구찌의 트레이드 마크로 활용되고 있는 디자인으로 가방, 신발, 벨트, 악세사리 등 온갖 곳에서 활용되는 구찌를 상징하는 디자인 중 하나이다. 1953년 창업주 구찌오 구찌가 사망하고 첫째 아들 알도 구찌와 셋째 아들 로돌프 구찌가 경영권을 나눠 가졌다. 알도 구찌는 특유의 감각으로 구찌의 성공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아버지 구찌오 구찌에서 영감을 얻은 맞물린 GG 로고를 개발해 세계적 기업으로 이름을 알리는데 기여하였다. 현재의 구찌 로고로도 사용되고 있다. 이후 런던, 파리 및 베벌리 힐스에 매장이 들어섰다. 1970년대에는 아시아 진출도 본격화해 도쿄와 홍콩에 매장을 오픈하였다. 1977년, 60년대에 오픈했던 비버리 힐스 매장을 구찌 미술관으로 전환되었다.
1981년 피렌체에서 창사 이래 최초로 런웨이 패션쇼를 개최하였다. 1982년 구찌 가족 경영진들의 논의 끝에 로돌프 구찌가 디자인부터 생산, 공급 모든 단계에 관여하는 경영권을 가지도록 결정하였다. 1년 뒤 로돌프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마우리찌오 구찌가 경영권을 물려 받으면서 브랜드가 풍비박산 나버렸다. 이유는 집안 싸움 때문이었는데 대표적으로 회장이 동의하지 않았는 데 알도 구찌의 아들 파울로 구찌는 파울로 구찌라는 이름하에 핸드백, 악세사리, 와인등을 판매하는 저렴한 브랜드를 만들었다. 라이센스 남발이 이어지면서 브랜드 이미지가 싸구려가 되버렸다. 당연하게도 구찌 내부에서는 난리가 났다. 가족 경영에도 위기가 불어닥쳤으며 회사 이미지와 더불어 재정난도 심화되었다. 구찌에 큰 위기가 닥친 시기였다. 1987년 바레인에 본사를 둔 투자회사 Investcorp가 구찌의 지분을 인수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초반 투자회사 Investcorp가 구찌의 전체 지분을 차지하였다. 1994년 가족 경영 체제를 탈피한 후 톰 포드가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변호사 출신 도미니코 드 솔레가 구찌의 CEO로 임명되었다. 톰 포드는 로고, 홀스빗 등 구찌의 전통적인 유산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큰 성공을 이뤘다. 새로워진 구찌는 대중들에게 어필했고 1998년 유럽언론협회의 올해의 유럽 기업에 선정되기도 한다. 톰 포드 이후 단순히 디자인만 하는 수석 디자이너 개념에서 매장, 광고, 제품 등 회사 이미지 전체를 전두지휘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위가 유행하게 되었다. 한편, 1995년 마우리찌오 구찌가 밀라노의 자택 앞에서 전처의 권총에 피살되었다. 1999년 PPR(Pinault-Printemps-Redoute)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단일 브랜드 회사에서 복수 브랜드 그룹으로 전환되었다. 2004년 톰 포드는 재계약 과정에서 도미니코 드 솔레와 의견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결국 구찌를 떠나게 되었고 프리다 지아니니가 2006년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프리다 역시 구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4년간 46% 매출 신장을 기록하였으며, 2007년 닐슨의 세계에서 가장 갖고 싶은 명품 브랜드에 선정되었다.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가 싶더니 2009년 새로운 CEO 패트리지오 디마르코가 임명된 후 매출이 감소하는 등 점차 뒷쳐져가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한다. 실적 부진이 이어지자 2014년 프리다 지아니니와 패트리지오 디마르코 구찌를 이끌던 2명의 수장은 계약이 종료되었다.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구찌는 2015년 전환점의 해를 맞는다. 새로운 수장 자리에는 마르코 비자리와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영입되었고 구찌의 구원투수가 되었다. 비자리는 스텔라 맥카트니와 보테가 베네타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업계에서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무명이던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임명은 파격 인사였다. 미켈레는 구찌 스튜디오에서 12년간 일하긴 했지만 알려진 바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 대다수 패션업계 관계자들은 구찌의 부진은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미켈레의 새로운 컬렉션이 발표된 이후 업계의 눈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기존의 올드하고 식상한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신세대적인 구찌를 내놓았다. 다소 매너리즘에 빠졌던 브랜드 전반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바꾸면서 스트릿, 힙합 패션 등지에서 큰 인기를 끌며 가장 핫한 명품 브랜드 중 하나로 올라섰다. SNS를 통해 캐주얼하면서도 젊은 감성의 독특한 디자인이 입소문을 타며 이후로도 여타 패션 하우스와는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바뀌게 된 원인 젊은층의 폭발적인 입소문에 2015년 매출은 전년대비 15%, 2016년에는 17% 급등하였다. 실제로 2019년 수익의 60%가 30세 이하 고객층에서 나오고 있다. 예전에는 루이비통, 샤넬과 같이 여성들이 주로 찾았었지만 남성들의 구매욕을 이끈 지갑, 상의, 바지 등 힙한 스타일의 디자인이 시즌별로 나와 남성 층을 많이 유입시킨 것도 좋은 요인 중 하나이다. 2017년에는 에르메스, 2018년에는 샤넬의 매출을 제치며 단숨에 업계 2위의 명품 브랜드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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